- 원작 169화 에피소드(바닷가) 중 12~13페이지 사이의 망상입니다.
“니레 쨩 어서 와~”
한창 물속에서 놀던 무리를 빠져나와 니레이 혼자 파라솔이 펼쳐진 자리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제법 즐겁게 놀았는지 부드러워 보이던 평소의 노란 곱슬머리는 물에 젖어 푹 가라앉아 있었다.
“니레 군, 춥겠다. 여기 타올.”
“으아, 감사해요……!”
곧바로 스오에게 타올을 건네받은 니레이는 무거워진 머리카락을 타올로 탈탈 털었다. 흡사 산책하러 나갔다가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가 온몸을 터는 듯한 그 모습에 스오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흘렸다.
“와, 니레 쨩 엄청 젖었네. 벌칙 게임이라도 당했어?”
“파도 때문에 갑자기 튜브가 뒤집혀서……. 잠깐 머리도 말릴 겸 쉬러 왔어요.”
“다른 애들은 아직도 기운 넘치네.”
“하하, 다 같이 바다에 오는 건 처음이라 더 들뜬 걸지도 모르겠네요~”
니레이는 저 멀리 물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넘겨준 튜브에 매달려 츠게우라의 물장구에 질색하는 사쿠라의 모습 옆으로, 안자이와 쿠리타에게 둘러싸여 의문의 씨름 중인 스기시타가 보였다. 입학식 날만 해도 서로 불꽃을 튀기며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주먹을 날리던 두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자연스레 친구들 사이로 녹아든 모습에 니레이는 어쩐지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뻤다.
“그나저나 계속 땡볕 아래 있었더니 엄청 덥네요.”
목덜미에 타올을 두른 니레이는 돗자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아이스박스를 발견하곤 한껏 표정이 밝아졌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해맑게 웃음을 지으며 아이스박스를 뒤적이던 니레이는 금세 얼떨떨한 표정으로 키류와 스오를 돌아보았다.
“마실 거 벌써 다 떨어졌나요……?”
“어라라~ 안에 없어?”
“그러고 보니 도중에 쉬러 온 애들도 다들 니레 군처럼 아이스박스부터 살폈지.”
“다들 LP 보충 빠르네~”
원하는 걸 눈앞에서 잃은 충격 때문인지 니레이는 울적한 표정으로 텅 빈 아이스박스 안을 내려다보았다. 머리끝까지 바닷물에 빠진 탓에 입안은 텁텁하고 목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더위라도 먹은 것처럼 앉을 생각도 없이 멍하니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스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류 군, 잠깐 자리 좀 지켜줄 수 있어?”
“다녀 와~”
“매점 갈 건데 니레 군도 같이 갈래? 애들 몫까지 사 오려면 짐이 많아질 것 같거든.”
키류에게 짧게 인사를 한 스오는 여전히 멍하게 서 있는 니레이 앞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돌연 시야 앞에서 살랑 움직이는 노란 태슬에 니레이는 어깨를 움찔했다.
“……아, 네! 좋아요!”
“음료수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니레 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계속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체력도 많이 소비될 테니 겸사겸사 가벼운 간식도 사 가면 좋을 것 같았다. 평소에도 곧잘 주머니 속에 젤리 같은 걸 챙기던 니레이였다. 슬슬 허기가 질 무렵일 테니 자연스레 꺼낸 말이었다.
“니레 군?”
그렇지만 니레이에게서는 마땅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스오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팔 안에 음료수 여러 개를 끌어안고 서 있는 니레이는 어쩐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니레 군 괜찮아?”
“……네? 아, 뭐라고 하셨나요?”
“음. 일단 계산 먼저 하고 올 테니까 그거 전부 나한테 줄래?”
“네? 그래도 너무 스오 씨만…….”
니레이는 미안한 표정으로 스오를 바라보았지만, 단호한 손길로 제 품 안에 있던 음료수를 가져가는 그의 행동은 막을 수 없었다. 팔 하나로 짐을 모두 거둔 스오는 다른 한 손으로 니레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니레 군은 여기서 잠깐 기다려.”
단호한 표정과는 다르게 제법 상냥한 손길에 니레이는 결국 거절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 니레 군.”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스오는 대뜸 니레이 앞으로 생수병 하나를 건넸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바싹 마른 입술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 손에 생수병을 든 채로 마시지도 않고 멀뚱멀뚱 서 있는 니레이의 모습에 스오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니레 군, 잠깐 가만히 있어봐.”
스오는 손을 뻗어 니레이의 목 언저리에 둘리어 있던 타올을 잡아 들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허공에 타올을 한번 펄럭 턴 그는 그대로 니레이의 머리 위로 타올을 휘이 둘러맸다. 턱 아래로 내려온 타올 끝자락을 정갈하게 매듭지을 때까지 니레이는 스오가 왜 그러는지 묻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바닷가에 와서 조금 피곤한 걸까. 얼마 전부터 정신이 조금 몽롱한 것 같기도 하다. 내내 조용히 서 있는 니레이의 모습에 스오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돌아서 갈까?”
시끌벅적한 해변과는 다르게, 스오의 손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긴 산책로는 같은 공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마침 그늘 속 벤치를 발견한 두 사람은 잠시 자리에 앉은 참이었다.
“가벼운 일사병일지도 모르겠네.”
생수병으로 볼을 문지르던 니레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짧게 끄덕이고 말았다. 확실히 오늘 날씨는 제법 무더운 편이었다. 몇 시간이나 땡볕 밑에서 놀았으면 더위를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서늘한 곳에서 쉬며 수분을 보충해 준 덕분에 전보다는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모처럼 다 같이 놀러 왔는데, 저 때문에 스오 씨는 제대로 즐기지도 못 하고…….”
“어라, 아까 말했던 거 잊었어? 나는 바닷물에 닿으면 쭈글쭈글 메말라 버리니까.”
“아……. 네.”
“여전히 이런 데선 차갑네, 니레 군은~”
스오의 시원찮은 농담에 니레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어느 정도 몸 상태가 나아진 증거니까 다행이려나. 스오는 안도한 말투로 작게 웃어 보였다.
“게다가 나는 지금도 충분히 즐기고 있는걸.”
“네?”
어쩌면 아직 열이 덜 가셨을지도 모른다. 종종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스오였지만 오늘은 유독 그랬다.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니레이는 굳이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스기시타 군, 조금 변한 것 같네.”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름에 니레이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그는 얼마 전 스기시타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마냥 위험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거리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기쁜 일이지만 워낙 사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에 스기시타와 있었던 일은 남모르게 함구하던 니레이였다.
“그, 그런가요?”
“응. 특히 니레 군이랑 많이 친해진 것 같더라.”
하지만 스오는 남들보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무리 니레이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무슨 일이 있었구나 정도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가, 같은 다문중이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홀랑 까발릴 수는 없었다. 당사자인 스기시타가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본인도 남의 이야기를 제삼자에게 발설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각하는 게 뻔히 보이는 니레이의 모습에 스오의 입꼬리가 작게 곡선을 그렸다. 어쩜 이렇게 속이 훤할까. 처음엔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구나, 정도만 생각했다. 솔직히 어떤 말을 주고받았을까 조금 궁금했지만 깊이 파고들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어, 어쨌거나 스기시타 씨 이야기는 이제 됐으니까!”
그저 콕 찔렀을 때 돌아오는 니레이의 반응이 재밌어서 조금 놀리고 싶은 것뿐이었다. 어느새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니레이의 행동에 스오는 당장이라도 쿡쿡 새어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겨우 갈무리했다. 아, 재밌다. 다음에는 스기시타 군도 한번 찔러 볼까.
평범한 농담으로는 싸늘하게도 사쿠라나 츠게우라 같은 재밌는 반응을 돌려주지 않는 니레이였다. 그야 이렇게 몰아세울 여지가 있으면 놓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스오는 슬쩍 니레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보다 시선도 또렷하고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도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 시덥지 않은 장난에 빠르게 반응하는 걸 봐서는 제법 몸 상태가 나아진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그러고 보니, 음료수 사러 온 건데……. 다들 마실 것도 없는데 괜찮을까요?”
“정 급하면 매점이라도 가겠지.”
“어떨 때 보면 스오 씨도 참 남들한테 매정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츠게우라 씨라든지.”
남들에게 별로 관심 없어 보이는 스오의 대답에 니레이는 우와, 하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오는 니레이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원래 좋아하는 애한테만 상냥하게 대하자는 주의거든.”
“아, 네…….”
“니레 군, 그거 무거우니까 내가 들게.”
음료수가 가득 든 봉투를 니레이가 들자 스오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러면 짐꾼으로 따라온 자신이 쓸모가 없지 않은가. 니레이는 단호한 얼굴로 봉투를 휙 돌렸다.
“아~ 아까도 그렇게 혼자 다 들었잖아요! 이제 저 상태 괜찮아졌으니까 들 수 있어요!”
“그러면 반씩 들고 가자. 응?”
“아, 알겠어요…….”
매점에서부터 여기까지 스오가 혼자 짐을 들고 온 게 미안했던 니레이였지만, 드물게 완고한 스오의 고집을 꺾기는 어려웠다. 결국 봉투 손잡이를 하나씩 나눠 잡게 된 두 사람은 천천히 해변가로 발걸음을 나아갔다.
202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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