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잔~ 스오 씨 이것 좀 보세요!”
니레이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작은 상자를 들어 보였다. 방수 밴드라고 적혀있는 상자 겉면에는 노란 병아리 패턴으로 가득한 밴드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저번에 사놓은 밴드를 벌써 다 써서 새로 샀어요! 이번에 엄청 귀여운 밴드를 발견한 거 있죠~ 얼른 써보고 싶어요!”
“하핫, 정말 귀엽네. 그래도 다치는 건 조심해야지.”
매일은 아니었지만 스오와 니레이의 특훈은 꾸준히 이어졌다. 벌써 파스와 밴드를 두세 통은 비웠을 정도로 많이 구르고 다쳤지만, 날이 갈수록 니레이의 부상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눈에 보이는 성장 덕분인지 최근 니레이는 특훈에 대한 의욕이 엄청났다. 덕분에 두 사람은 오늘도 방과 후 하천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조금 불안한 마음도 있긴 했다. 오후부터 먹먹한 잿빛을 띠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벌써 6월 중순이 지났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일기 예보를 확인하지 않았다. 학기 초에는 반 친구들이 곧잘 사쿠라에게 날씨를 물어보곤 했는데 최근 들어선 그런 장난도 잦아들긴 했다.
역시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았으려나. 한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니레이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방과 후 특훈. 처음에는 마냥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사쿠라나 다문중의 모두처럼 강해질 수는 없다고 해도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을 정도라도 좋았다. 그런 작은 발걸음을 거듭해 조금씩이라도 그들과 함께 나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스오의 제자가 된 건 좋았지만, 최근 들어 니레이에게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 피어나고 있었다. 특훈을 거듭할수록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건 당연했다. 남들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시간을 공유했고 꼭 특훈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레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 후우린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스오와 이렇게 친밀한 관계가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니레이는 곁눈질로 스오를 힐끔 쳐다봤다가 자랑하던 밴드를 다시 주머니로 챙겨 넣었다. 스오가 좋은 사람인 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스오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어…….’
언젠가부터 제 안에 피어난 감정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었다. 좀 더 스오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함께 웃으며 떠들고 싶었다. 어쩌다 손이 스치면 열이 나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고, 모르는 척 그 손을 맞잡을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적으로 말해, 니레이는 스오에게 홀딱 빠져있었다.
물론 특훈을 구실로 삼는 건 아니었다. 모두처럼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고, 성심성의껏 자신을 도와주는 스오를 볼 때면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하는 생각 역시 변함없었다. 그렇지만 스오를 좋아하는 자신을 떠올리면, 혹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특훈을 게을리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뒤따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니레 군?”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니레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에!”
“이쯤이면 될까 해서.”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하천 부지에 다다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넘어져도 크게 아프지 않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특훈 장소는 항상 이곳, 풀이 무성한 하천가였다. 바로 옆에는 산책로가 쭉 펼쳐져 있어서 가끔 산책 나온 강아지들도 보이곤 하는 자리였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그리 길게는 못 할 것 같네.”
“그렇네요. 짧은 시간이지만 열심히 할게요!”
“후훗, 니레 군은 모범생이네.”
그러면 오늘은—
부드럽게 웃던 스오가 자세를 다잡는 것과 함께 오늘도 특훈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번이고 화려하게 넘어진 덕분에 니레이의 교복은 벌써 흙먼지가 가득했다. 배웠던 기술을 몇 번이고 연습하는 건 괜찮았지만,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날이면 니레이는 곧장 넘어지곤 했다. 원체 체력이 없는 그였기 때문에 초반 습득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니레이는 풀밭 위로 몸을 대자로 펼친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끄, 끄떡없어요!”
스오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니레이는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 일어날 체력은 안 되는지 그는 여전히 풀밭에 엉덩이를 붙인 채였다. 기운 넘치는 대답과는 다르게 힘이 쭉 빠진 모습에, 스오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손길에 니레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으앗…….”
“풀이 잔뜩 붙어있길래.”
계속 넘어져서 그런가 봐. 스오는 옅게 웃음 지으며 니레이의 손을 끌어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기상에 니레이는 흐트러진 중심을 겨우 다잡으며 일어설 수 있었다. 스오 씨가 또 손을 잡아줬어……. 머리에 손이 닿을 때부터 긴장되던 마음은 맞잡은 손길에 더욱 진정할 수 없었다. 마음의 평정심을 찾기 위해 괜히 교복 매무새를 다잡던 니레이의 손등 위로 문득 톡, 하고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어라,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든 순간 그의 의심을 확신시켜 주듯이 얼굴 위로 다시 한번 물방울이 떨어졌다.
“벌써 내리기 시작했네.”
“우산도 없는데 더 내리기 전에 얼른 돌아가죠!”
비가 내릴 거라곤 어느 정도 상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자리를 떠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가늘게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굵은 빗줄기로 변해 사정없이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유롭게 걸음을 나아가던 두 사람은 강하게 쏟아지는 비에 급하게 굴다리 밑으로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산은커녕 비를 막을 가방조차 없었던 그들은 결국 온몸이 잔뜩 젖고 말았다.
“으아, 갑자기 소나기가……! 스오 씨 괜찮으세요?”
“응. 니레 군이야말로 괜찮아?”
“저도 괜찮……. 아!”
니레이의 입에서 새파란 비명이 내질러졌다. 스오가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니레이는 서둘러 교복 상의를 벗어 던졌다. 다급하게 안 주머니를 살펴보던 그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니레이의 손에는 기적적으로 젖지 않는 극비 노트가 들려져 있었다.
“안쪽 주머니에 넣어놔서 다행히 무사하네요…….”
“그쪽도 다행이네~”
그대로 젖은 상의에 보관하는 건 불안했는지 니레이는 극비 노트를 마른 바닥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 소중한 노트의 안위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손가락이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통증의 정체는 오른쪽 검지였다. 아마 풀밭에서 뒹굴 때 풀에 베인 것 같은 작은 상처였다. 스오 역시 그의 부상을 알아차렸는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드디어 병아리 밴드 써보겠네~”
“밴드 붙일 정도로 큰 상처는 아니지만요.”
니레이는 하하,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 속에 있던 밴드를 꺼내 들었다. 빗물에 박스는 살짝 젖어 있었지만 안의 내용물은 별로 젖지 않았다. 역시 방수 밴드로 사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병아리가 가득 그려진 밴드를 하나 꺼냈다. 하지만 손에 있던 밴드는 곧바로 스오의 손으로 돌아갔다.
“왼손으로 붙여야 하니까 불편하잖아? 도와줄게.”
“아, 감사해요……!”
니레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스오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작스럽게 잡힌 손에 니레이는 조금 당황했지만 스오가 손을 놓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세 검지 위를 감싼 샛노란 병아리 밴드와 긴장할 새도 없이 놓아진 손에 니레이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스오 씨는 그냥 밴드를 붙여주려고 한 건데 아쉽긴 무슨…….’
그는 밴드가 붙은 검지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닿았던 탓에 스오의 온기는 진작에 사라진 손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붙잡아줘도 좋았을 텐데. 괜한 욕심이 손을 타고 가슴 깊은 곳을 짓누른다.
“많이 따가워?”
문득 들려오는 질문에 니레이는 핫, 하고 고개를 들었다. 스오가 제법 걱정스러운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니레이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얼마나 세차게 흔들었는지 머리카락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울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남이 본다면 진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처럼도 보일 것 같았다. 니레이는 괜히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댔다. 연신 바닥을 두드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둘이 있어야 하는 걸까. 니레이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궁금했는데.”
먼저 운을 뗀 건 스오였다. 니레이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니레 군, 나 좋아해?”
과연 무슨 의미인 걸까. 갑작스레 던져진 돌에 니레이는 연못 위 개구리라도 된 것 마냥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후덥지근하다고 느꼈는데. 스오의 질문 한 마디에 차갑게 식어가는 손이 느껴졌다. 전부터 궁금했다니 언제부터 알아차린 걸까. 그렇게 많이 티 났나? 혹시 기분 나쁘다고 하면 어떡하지.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생각에 니레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갑게 식은 니레이의 손 위로 스오의 손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몰아붙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
스오는 사뭇 미안한 표정으로 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니레이는 여전히 최선의 대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겹쳐진 스오의 손길이 자신과는 다르게 따뜻해서,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랐다.
“혹시 내 착각이었다면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미안해.”
“아, 그게…….”
사실은 착각이 아닐 텐데. 마음속으로는 대답할 수 있어도 목구멍 바깥으로 그 감정을 내뱉는 건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니레이에게는 아직 그 용기가 없었다. 그러면 이대로 착각이라고 넘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저는…….”
“나는 좋다고 생각했거든, 니레 군이.”
니레이는 그대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혹시 너무 커다란 충격을 받아서 스오 씨의 말을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치환하는 건 아닐까. 그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네?”
“그럼 나 혼자 짝사랑인 거네.”
아쉽다. 스오는 그렇게 덧붙였다.
이게 지금 무슨 말이지? 몰려오는 의문에 니레이는 가만히 입을 뻐끔거렸다. 겹쳐진 손이 뒤늦게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는 머리를 새하얗게 쓸어버리는 것 같았다. 스오 씨가 짝사랑을? 누구를? 니레 군이 좋다고? 니레 군이 누구더라……. 어라.
“저, 저, 저요……?!”
뒤늦게 몰려오는 사실에 니레이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한껏 뒤집어지는 니레이의 목소리에 스오는 숨길 새도 없이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응. 근데 짝사랑이었나 봐~ 어쩔 수 없지.”
“아, 아니…….”
“음?”
능청스럽게 제 손을 잡아끄는 스오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니레이는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스오 씨가, 스오 씨도 나를 좋아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오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칠 정도로 스오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럼 믿어도 되지 않을까. 니레이는 숨을 크게 들이셨다.
“그, 그거 짝사랑 아닐걸요……?!”
“아니야?”
니레이의 기운 넘치는 대답에 스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 혹시 지금 일부러 놀리는 건가? 니레이는 그제야 스오의 덫에 단단히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의 생각은 역시 취소. 스오 씨는 사실 나쁜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니레이는 민망함에 볼이 화끈거렸다. 당장이라도 빗속으로 뛰어들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러니 이대로 직진하는 수밖에. 니레이는 다시 한번 용기를 꾹 삼켰다.
“저, 저도 스오 씨를 좋아해요…….”
드디어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잡혀있던 손이 강하게 끌어당겨졌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제 몸을 꼬옥 끌어안는 스오의 행동에 니레이는 어버버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것도 잠시, 니레이는 부끄러움에 주저하던 손을 뻗어 겨우 스오를 마주 안을 수 있었다. 그의 손길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스오는 좀 더 강하게 니레이를 끌어안았다.
“후훗, 참 잘했어요.”
“……놀리는 거 아니죠?”
“설마.”
빗물에 젖은 옷 때문에 차가워진 피부 위로 서로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분명 비와 땀에 젖어서 기분 나빠야 할 텐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닿아있어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이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스오는 제 품 안에서 소중히 끌어안았던 니레이를 놓아줬다. 조금 더 닿고 싶었는데. 니레이는 조금 아쉬운 마음에 스오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스오 씨, 저…….”
“있지, 키스해도 돼?”
조금만 더 안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먼저 선수를 친 건 스오였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니레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 지금 뭐라고……. 한껏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스오는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까워지는 스오의 얼굴에 니레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두 눈을 꾹 감아버리고 말았다.
“자, 잠깐……!”
“……물론 농담이야.”
후, 하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긴장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뻔한 니레이를, 스오는 가까스로 붙들어 안았다. 아직 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제 뺨을 매만지며 니레이는 분하다는 얼굴로 스오를 쏘아보았다.
“너무해요……!”
화를 내는 건지 부끄러워하는 건지 헷갈리는 모습이 제법 웃겨 스오는 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 얼른 그치면 좋겠네.”
그는 빗물을 털어내듯 한 손으로 니레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당분간은 비가 그치지 않을 것 같은 하늘 아래, 두 사람은 조용히 손을 마주 잡았다.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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